🍋 레몬
검은 양장 위로 그려진 노란 레몬이 시선을 잡아끈다. 이 일렁이는 노란빛은 아름다운 한편으로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뒷표지에 적힌 글의 첫줄은 이렇게 시작한다.
2002년, 언니가 살해됐다
각 장은 소제목과 연도가 함께 표시된다. 살인 사건이 속도감 있게 해결될 걸 기대했다면 목차를 보고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연도는 띄엄띄엄 이어지다 사건이 일어난 17년 뒤인 2019년에 끝이 나기 때문이다.
한일 월드컵으로 한창 뜨거웠던 여름, 개학을 하루 앞둔 날 누구나 한번 보면 잊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였던 해언이 공원에서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열아홉 한창 싱그러워야 할 그녀의 삶이 거기서 그렇게 무턱대고 끝이 나버린다.
소녀를 마지막으로 목격했고,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였던 부잣집 아들 신정준과 가난한 배달원인 한만우는 각각의 알리바이로 혐의에서 벗어나고 사건은 미궁으로 남는다.
책의 첫 장은 사건 이후 한만우의 취조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실제로 16년 뒤인 피해자의 동생인 다언이 수사 기록을 토대로 상상한 것이다. 이 시점에 다언은 누가 범인인지 알고 있으며, 복수에 성공한 것 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처럼 보인다.
이어지는 장들은 다언 외에도 해언과 같은 반 급우이며 신정준의 여자 친구인 윤태림과 다언의 문예 동아리 선배인 상희가 화자로 등장한다. 그들은 각자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각자가 알고 있던 사실, 사건 이후의 일들과 감정을 서술하는데 이런 구성을 통해 독자가 사건 전체를 입체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게 해준다.
결말에 다다랐을 때 갖게 되는 감정은 후련함보다는 먹먹함에 가까운데 복수가 성공했다 한들 죽은 자는 돌아올 수 없고, 남은 사람들의 삶 또한 예전과 같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미스터리 소설 형식이 갖는 흡입력도 있겠지만 권여선 작가가 그려내는 화자와 그 주변인들의 생생함, 그리고 특유의 섬세한 문장이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책을 다 읽은 후에, 아래의 작가 인터뷰를 보고 다시 읽으면 더욱 깊이 있는 감상이 가능하다.